대국민 ‘한국사 바로 알기’ 프로젝트! 中 p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남긴 말씀입니다. 축구 한일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플래카드로 내걸릴 만큼 많은 국민이 알고 있는 유명한 경구이지만,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데 소홀한 요즘 세태를 보면 우리 민족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때론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전범국으로서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점점 더 과격한 우경화 행보를 보이는 일본을 앞에 두고, 우리 학생들은 독립을 쟁취했던 선열들...
더보기 대국민 ‘한국사 바로 알기’ 프로젝트! 中 p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남긴 말씀입니다. 축구 한일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플래카드로 내걸릴 만큼 많은 국민이 알고 있는 유명한 경구이지만,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데 소홀한 요즘 세태를 보면 우리 민족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때론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전범국으로서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점점 더 과격한 우경화 행보를 보이는 일본을 앞에 두고, 우리 학생들은 독립을 쟁취했던 선열들의 희생을 잊고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 읽고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스러져간 학생들이 현재 학교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한낱 범죄자로 폄하하며 도발하는 가운데, 안중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야스쿠니 신사는 젠틀맨이며, 매국노 이완용이 나라를 지킨 영웅이 아니냐고 되묻는 우리나라 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슬프기까지 합니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강의한 지 올해로 19년째입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한국사를 알리고 가르치는 데 힘쓰며 우리 역사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노력과 무관하게 점점 더 역사에 무관심해져만 가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서 때론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때론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강의 20주년을 앞둔 이 시점에 우리 역사를 위해 좀더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고, 부족하나마 이 책을 펴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좀더 깊이 있고 전문적인 내용을 다룰 수도 있었겠지만, 모두가 쉽고 편하게 읽고 즐길 수 있는 역사책이 되길 바랐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역사책을 만들고 싶었고, 마치 어릴 적 기분 좋게 받았던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 되길 바랐습니다.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내용물이 들어 있어서, 기호에 따라 어떤 것부터 손을 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상자속의 과자들처럼 이 책에 실린 어떤 주제를 골라서 읽어도 이해가 쉽고 유익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기본적인 역사 상식들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주제들을 선정했고, 생소할 수 있는 용어들은 쉽게 풀어 쓰고자 했습니다.
선덕여왕의 매력 발산 中 p30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게 분황사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하루는 당나라의 황제가 선덕여왕에게 그림을 선물합니다. 이 그림에는 붉은색과 자주색, 흰색으로 모란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림과 함께 모란의 씨도 같이 보내왔죠.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황제가 공주를 꽃에 비유했다며 좋아했는데, 오직 선덕여왕(덕만공주)만이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었기 때문이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온 모란의 씨를 심어 꽃을 피워봤더니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선덕을 꽃에 비유하되 향기가 없는 꽃으로 표현했다는 건, 여자라지만 향기를 내뿜을 정도의 매력은 없다는 점을 당나라 황제가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선덕에게는 배우자가 없었거든요. 남편도 없는 여자가 무슨 매력이 있겠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희롱을 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이에 선덕은 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대응합니다. 여왕으로 즉위하고 3년이 지난 634년, ‘황제의 향기’라는 이름의 절을 지어버린 거죠. 이 절의 이름이 분황사입니다.
이렇게 당나라 황제와 선덕여왕이 소통했던 방식을 보면, 그 본질은 조롱이라고 하지만 표현이 무척 절제되고 옛사람들만의 멋이 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문화와 은유로 대화하는 방식이 참 품위 있지 않나요? 무엇보다 이 모든 일화를 통틀어 알 수 있는 건 선덕여왕이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다는 점이지요. 당나라 황제가 보낸 그림을 보고 자신에 대한 희롱을 알아채는 식견이 있었으니까요. [모란도]에 대한 일화를 조금 덧붙이자면, 당나라 황제가 세 송이의 꽃을 그려 보낸 것은 신라에 세 명의 여왕이 나올 것임을 예견해서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라는 이후 세명의 여왕(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을 배출합니다.
삼천궁녀의 미스터리, 의자왕 中 p41
‘삼천궁녀’라는 말은 조선 중기 시인인 민제인의 「백마강부」란 시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에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숫자를 헤아린 게 아니라 ‘굉장히 많음’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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